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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3-09-2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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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미안(未安)하다.

기사입력 2023-03-1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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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천만(未安千萬)하다. 라는 말은 남에게 괴로움을 끼쳐 거북함을 뜻하고 미안(遲晩)이라는 말은 더딜지() 자에 늦을 만()자를 쓰는데 옛날에 죄인(罪人)이 벌()을 받을, 때에 자복(自服)하면서,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라는 뜻으로 쓰여, 자기(自己)의 죄를 자복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무례한 행동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 때 사과하는 뜻으로도 사용하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미안(未安)하다. 감사(感謝)하다라는 단어가 많아야 사람이 모여서 살만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서양(西洋) 사람들은 조금만 부딪쳐도 미안합니다. 조금만 도움을 주어도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입버릇처럼 되어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복잡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남의 발을 밟아놓고도 미안하다고 인사기는커녕 밟힌 사람이 아파서 밟은 사람을 바라보면 왜 쳐다보아 내가 일부러 밟았어, 보다시피 차내가 콩나물시루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밟은 것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어 신경질 나게 이런 것을,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해야 하나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라고 해야 하나 적당한 단어선택(單語選擇)이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으면 미안합니다. 라고 우선적(優先的)으로 사과부터 하고 사연(事緣)을 말해야 옳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 때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했다. 도리어 문제의 핵심은 떠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 근성은 일취월장(日就月將) 발전하여 더욱더 심하면, 심했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담 부부가 최초의 인간으로 태어나서 낙원에서 생활하는데 그들에게 계명을 주었는데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부인이 뱀에게 유혹(誘惑), 받아 선악과(善惡果)를 따서 먹었다.
 

 

이때 창조주(創造主)가 책임을 추궁하는데 남편인 아담에게 물었다. “네가 왜 금한 실과를 먹었느냐?”라고 물으니 예 아내가 먹으라고 주어서, 먹었나이다라고 책임을 아내 때문이라고 하였다. 창조주는 부인 하와에게 너는 왜 금한 실과를 먹었느냐?”라고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창조주는 남자에게는 평생 노동을 하도록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먹고 살도록 하였고 여자에게는 해산(解産)의 고통(苦痛)을 주었으며 뱀에게는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고 살도록 하였다.
 

 

여기서 아담 부부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다는 사과는 한마디도 없고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럼, 이들은 왜 창조주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을까? 욕심 때문이었다. 뱀이 말하기를 이 실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 보다. 더 위대해진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 이성(理性)을 잃었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려고 할 때 어떤 짓을 해도 사과하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즉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삐뚤어진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이방원은 권력을 탐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가? 그렇게 해놓고도 그가 정중하게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아버지 친구도 동생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권력의 욕심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심지어 처가댁의 사람들까지도 그냥 놔두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보면 권력의 욕심은 인정도 사정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뱀과 같이 물어서 죽이는 살인마가 되는가? 보다 싶어 권력에 욕심을 내는 사람들은 보면 무섭다.
 

 

요나 선지자는 자신이 창조주에게 죄를 짓고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다. 이때 선장은 누구 때문인가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죄를 짓고 도망가는 요나라는 선지자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때 요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 상의 책임을 지려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야만 바다가 잔잔하여지고 상선한 선객들의 생명도 보존할 수 있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자기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배에 탄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그를 바다에 던졌다. 그를 바다에 던지니 바람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요나 선지자는 미안하다. 죄송하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에 탄 사람들도 그 죄인 하나를 감싸고 돌다가는 모두가 죽는, 다는 것을 알고 그를 살리려는 생각은 포기하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바다에 던졌다는 것이다. 죄는 덮어, 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죄는 지은 사람이 책임을 지고 희생하지 아니하면 해결되지, 아니 하는 것이다.
 

 

요즘 정치계를 바라보면 매우 아쉬운 점이 적지 않게 많이 든다. 자신 때문에, 검찰의 조사를 받고 그래도 무엇에 억눌리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스스로 끊었는데 그것도 그 일에 내일로 조사를, 받던 사람들 5명이나 희생했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 때문에 유명(幽明)을 달리, 하였으니,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검찰 조사가 가혹해서 죽었다는 말은 큰 대권을 꿈꾸는 사람으로서는 그릇이 너무나도 작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은 죽었으니 나 때문에 죽었다니 미안하다. 하고 죽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죽은 사람이나 유족들에 대한 도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이윤근 칼럼리스트 (airturbo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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